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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다

8 30

Jeremías Schröder

Abbot President

유럽 고대문학의 서사시 중 하나는 ‘일리아드-율리시스의 귀가(歸家, homecoming)’이다. 율리시스는 수십 년 동안 길을 떠나야 했다. 길을 가던 도중 나쁜 신들을 계속해서 만나야 했고 가던 길을 거듭 멈추어야 했다. 하지만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페넬로페와 몇몇 사람들은 그가 돌아오기를 고대하였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가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 서로를 알아보는 장면, 그리고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죽이는 장면들은 흥미진진한 무대를 장식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다른 유명한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는돌아온 탕자이다. 이야기에는 기뻐하는 아버지와 유순하지만 특히기뻐하지 않는 아들이 나온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서 무언가를 배운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면서 기다렸다. “작은 아들이 멀리 오는 보았을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았다.” 어쩌면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라바날 까미노에 있는 수도원에서 끝기도 후에 순례자들을 위해 축복해 주는 기도문에는지금은 집에 있지 않으나라는 구절이 나온다. 구절은 순례자가 겪는 부재(不在, absence) 고통을 의미하면서 언젠가 집으로 돌아갈 것을 예고한다. 기도구절이 특히 마음에 닿았고 모든 순례자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돌아갈 그곳에 도착하기를 바랐다.

까미노 온라인은 훌륭한 세상의 여정이었다. 지난 몇 주 동안 까미노 온라인에 올라온 순례지들은 내가 방문했던 곳이었다. 나의 업무 중 하나는 연합회에 소속된 수도원들을 시찰하고 살펴보는 것이다. 이런 나를 보고 어떤 형제들은 부러워하기도 하고 또 어떤 형제들은 나의 생활이 안정되어 있지 않다면서 안쓰러워한다. 여기에 무언가의 진실이 있다. 수도원들을 일 년에 수차례 방문해야한다 하더라도 가는 것만 허락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 크나큰 위안이 된다. 운이 좋게도 항상 같은 손님방에서 같은 침실을 쓰고, 형제애적 사랑으로 환대를 받으며, 며칠 동안 혹은 몇 주 동안 그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지낸다. 이렇게 하면서 길을 가는 여정 중에도 집에 있는 것처럼 느끼고, 이러한 방문들로 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자그마한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나의 영혼에 많은 도움이 된다.

독일에서 ‘Heimat’라는 단어는 뿌리, 근원, 관계, 소속이란 뜻을 담고 있는데이란 느낌을 가지게 한다. 단어는 가족적인연대를 뜻하는 정주를 서원하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에게 아주 어울린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출발하고, 집을 떠나고, 중요한 주제들을 내버려두는 이상의 것들을 요구한다. 순례는 가야하는 곳을 향해 가는 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복음에는 집을 향한 감성적인 사랑이 나타나 있다. 804년에 선종한 투르의 알퀸 성인은 앵켈로 색션족의 유머를 인용했다. 그는 주교로서의 편안함을 원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감옥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야했다. “우리가 사는 곳이 가장 중요한곳이라면 천사는 하느님에게서 나올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코로나 시기 동안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집에서는 마스크를 쓸 필요가 없다. 이것은 바이러스와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진실이 있다.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집 밖에서는 좋은 표양, 착한 표양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그러나 집에서 그렇게 할 필요가 없고, 있는 그대의 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만약 당신의 삶에서 새로운 자극이 있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당신을 조금 낙담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신이 가식 없이 정직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마스크가 더 이상 필요 없이 말이다.

수도원의 형제들은 첫 수련기를 마치고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가면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작게 보이는 인상을 받는다. 위대한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감정과 같다. 많이 보고 경험하면서 마음은 성장한다. 이때 집에 머무는 사람들이, 오래된 것들이 하찮게 보이는 유혹을 받는다. 역설적이게도 순례의 영성적인 열매는 집에 돌아와서는 넓은 마음으로 집에 있는 것들을 새롭고 사랑스럽게 다시 인식하는 것이다. 여러 번 언급했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좌우명이 또다시 떠오른다. 이 문구는 성 이냐시오의 가르침에 나오고 독일의 시인 횔데린도 인용하였다.

Non coerceri maximo,

contineri minimo,

divinum est.

위대한 것에 압도당하지 않고 가장 작은 것 안에 담겨져 있는 그것이 신적인 것이다

까미노에 함께 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리고, 또한 이 작은 프로젝트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기도와 도움과 동반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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